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이 아침과 저녁에 ‘쉐마’를 읽던 때였어요.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는 믿음의 고백이에요. 사람들은 하루가 열리고 닫힐 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겼어요.
그런데 쉐마를 읽는 자세를 놓고 두 학파의 생각이 달랐어요. 샴마이 학파는 성경의 “누울 때와 일어날 때”라는 말을 자세에 관한 지시로 보았어요. 그래서 저녁에는 누워서, 아침에는 일어서서 읽어야 한다고 했지요.
힐렐 학파는 다르게 읽었어요. 그 말은 저녁과 아침이라는 시간을 가리킬 뿐이라고 보았어요. 앉아 있든, 서 있든, 누워 있든, 길을 걷고 있든 정해진 시간에 읽으면 된다고 했어요.
어느 저녁, 랍비 타르폰이 길을 걷고 있었어요. 쉐마를 읽을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샴마이 학파의 말대로 하기로 했어요. 길 한쪽에 몸을 눕히고 저녁 쉐마를 읽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 길은 안전하지 않았어요. 랍비 타르폰은 지나가던 강도들에게 들킬 뻔했어요. 그는 가까스로 위험을 벗어났어요. 기도를 더 잘하려고 선택한 자세가 오히려 목숨을 위태롭게 한 셈이었어요.
그가 이 일을 현자들에게 들려주자, 현자들은 아주 매섭게 꾸짖었어요. 힐렐 학파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그런 위험을 불렀다는 뜻이었어요.
이 말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잘못했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돼요. 강도질의 책임은 강도에게 있어요. 현자들이 문제 삼은 것은 안전하게 걸으며 읽을 수 있는데도, 꼭 필요하지 않은 자세를 고집해 스스로 위험한 곳에 머문 선택이었어요. 가르침의 뜻보다 겉모습을 앞세우면 사람을 지켜야 할 규칙이 도리어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경고였지요.
얼마 뒤, 두 현자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같은 문제가 나타났어요. 랍비 이스마엘은 기대어 있었고, 랍비 엘아자르 벤 아자리아는 똑바로 앉아 있었어요. 저녁 쉐마 시간이 되자 엘아자르는 몸을 기댔고, 이스마엘은 오히려 몸을 일으켰어요.
엘아자르는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여겼어요. 그는 “당신의 수염이 길다고 하자, 나는 내 수염도 길다고 대답하는 사람 같군요”라는 비유를 들었어요. 자신이 몸을 기댄 뒤 곧바로 반대 자세를 취한 까닭을 묻는 말이었어요.
이스마엘은 두 가지 까닭이 있다고 설명했어요. 첫째, 그는 어떤 자세로도 쉐마를 읽을 수 있다는 힐렐 학파의 가르침을 따랐어요. 둘째,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엘아자르의 행동만 보고 “저녁에는 반드시 누워야 한다”고 잘못 배울까 걱정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반대 자세를 보여 주어, 한 자세만 정답으로 굳어지는 일을 막았어요.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더 편한 자세를 골랐느냐가 아니에요. 이스마엘은 자기 행동이 다른 사람의 배움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생각했어요. 선생의 작은 몸짓 하나가 학생에게는 큰 규칙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뒤이어 현자들은 샴마이 학파의 방식을 실제로 따라도 되는지 다시 따졌어요. 어떤 이는 두 학파 가운데 어느 쪽을 따라도 괜찮다고 보았어요. 그러나 다른 현자들은 이미 힐렐 학파의 가르침이 받아들여진 뒤에는 샴마이 학파의 자세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마지막에는 토론이 다시 랍비 타르폰의 길로 돌아왔어요. 현자들은 그가 규칙을 더 엄격히 지키려다가 오히려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일을 떠올렸어요. 좋은 규칙은 사람을 지키고 뜻을 또렷하게 해야 해요. 겉모습만 따라 하느라 안전과 목적을 잊는다면, 그 규칙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려워요.
그날의 쉐마는 한 가지 자세로만 완성되지 않았어요. 길을 걷던 타르폰의 위험과, 식탁에서 일어난 이스마엘의 조심스러운 몸짓이 함께 한 가지 질문을 남겼어요. “나는 규칙의 모양만 따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 규칙이 지키려는 뜻까지 헤아리고 있을까?”
이야기가 남긴 교훈
규칙은 겉모습을 똑같이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아요. 그 규칙이 사람과 배움을 어떻게 지키려는지 살펴야 해요. 랍비 타르폰의 일은 선한 뜻만으로 위험한 선택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줘요. 랍비 이스마엘의 행동은 나의 작은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가르침이 될지도 생각하라고 일러 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