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한 사람이 토라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글을 읽고 있었어요. 토라는 유대 전통의 가르침을 담은 성경의 첫 다섯 책이에요. 그는 그 안에서 ‘쉐마’라고 부르는 대목에 이르렀어요.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하는 믿음의 고백이지요.
마침 아침이나 저녁에 쉐마를 읽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어요. 그 사람의 입에서는 이미 알맞은 말씀이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겉으로 보면 따로 할 일이 없어 보였지요.
그런데 미슈나를 공부하던 현자들은 한 가지를 더 물었어요. 미슈나는 여러 세대의 가르침을 모아 놓은 책이에요.
“그가 토라를 읽다가 쉐마 구절을 만났다면, 그것만으로 쉐마를 읽을 의무를 다한 것일까요?”
미슈나의 답에는 짧은 조건이 붙었어요. 그가 마음을 두고 읽었다면 의무를 다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었어요. 같은 글자를 소리 내어 읽더라도,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마음으로 알고 읽는 일이 중요했어요.
이 대답을 들은 현자들은 곧바로 다음 질문을 꺼냈어요.
“그렇다면 모든 가르침은 반드시 특별한 뜻을 세우고 행해야 한다는 증거일까요?”
논의는 그렇게 빨리 끝나지 않았어요. 여기서 ‘마음을 두었다’는 말은 쉐마의 의무를 이루겠다고 따로 다짐했다는 뜻이 아닐 수도 있었어요. 그저 지금 적힌 말을 제대로 읽으려 했다는 뜻일 수 있었지요.
그러자 또 물음이 나왔어요.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토라를 읽고 있지 않았나요? 읽던 사람에게 다시 ‘읽으려 했다’는 조건이 왜 필요할까요?”
현자들은 그가 두루마리의 잘못을 고치려고 글자를 살피던 사람일 수 있다고 답했어요. 그런 사람은 이야기의 뜻을 따라가기보다 빠진 글자나 잘못 적힌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요. 입으로 비슷한 소리를 내더라도, 마음은 문장의 뜻보다 글자의 모양과 오류에 머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장면에는 두 가지 읽기가 겹쳐 있었어요. 하나는 글을 고치기 위해 낱글자를 확인하는 읽기였고, 다른 하나는 이어진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읽는 일이었어요. 현자들은 입에서 나온 소리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읽기를 하고 있었는지 살폈어요.
논의는 읽는 언어로도 이어졌어요. 랍비 유다 하나시는 쉐마를 기록된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보았어요. 반면 다른 현자들은 듣는 사람이 뜻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언어로 읽어도 된다고 보았어요.
두 쪽 모두 같은 구절을 근거로 삼았어요. 한쪽은 말씀이 적힌 모습 그대로 남아야 한다는 부분에 마음을 두었고, 다른 쪽은 ‘들으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어요.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일과 뜻을 알아듣는 일을 함께 떠올리게 했어요.
서로 다른 답이 나왔지만, 어느 쪽도 한 단어만 떼어 보고 멈추지는 않았어요. “들으라”와 “이 말씀들”이라는 표현을 함께 살피고, 소리와 순서와 이해가 각각 어떤 몫을 하는지 따져 보았어요.
토라를 읽던 사람은 이미 올바른 글자 앞에 있었어요. 그러나 현자들이 알고 싶었던 것은 눈과 입이 어디를 지나갔는지만이 아니었어요. 그 읽기가 단순한 점검이었는지, 이어진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는지도 함께 물었어요.
이야기가 남긴 교훈
같은 문장을 읽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 남는 것이 달라질 수 있어요. 숙제를 끝냈다는 표시만 남기는 읽기와, 뜻을 따라가며 읽는 일은 겉으로 비슷해도 같지 않아요. 책을 펼쳤을 때 잠깐 멈추어 “나는 지금 무엇을 이해하려고 읽고 있지?”라고 물어보세요. 글자를 놓치지 않는 눈과 뜻을 향하는 마음이 함께할 때 읽기는 더 깊어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