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유대인 현자들이 제자들과 가르침을 나누던 때였어요. 그 사회에는 사람을 자유인과 종으로 나누는 신분 제도가 있었어요. 당시 ‘종’이라 불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존재로 취급되었어요. 오늘날 우리는 그런 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타비는 라반 가말리엘의 집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어요. 어느 날 타비가 세상을 떠났어요. 가말리엘은 찾아온 사람들의 위로를 받았어요.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었지요.
제자들은 이상하게 여겼어요. 당시에는 종이 죽었을 때 자유인의 죽음과 같은 방식으로 위로를 받지 않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 종이 죽었을 때에는 이런 위로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까?”
가말리엘은 타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말했어요.
“타비는 다른 종들과 같지 않았단다. 그는 바르고 좋은 사람이었어.”
제자들은 규칙을 물었지만, 가말리엘은 타비의 성품을 대답으로 내놓았어요. 타비를 신분을 나타내는 한 단어로만 보지 않고, 이름과 삶을 지닌 한 사람으로 기억한 것이지요.
뒤이어 현자들은 당시의 위로 관습을 더 자세히 따졌어요. 랍비 엘리에제르의 집에서 일하던 여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제자들은 그를 위로하려고 찾아갔어요. 엘리에제르는 위층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제자들은 따라갔어요. 다른 방으로 가도 제자들은 다시 따라왔지요.
마침내 엘리에제르는 자신이 가르친 관습을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는 종의 죽음에는 자유인과 같은 위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잃은 것을 채워 달라는 짧은 말만 건넨다고 설명했어요. 사람을 물건처럼 다룬 그 표현은 당시 신분 제도가 얼마나 차갑고 불공평했는지를 보여 줘요.
랍비 요세는 다른 의견을 보탰어요. 바르고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의 좋은 삶을 말해 줄 수 있다고 했어요. 다른 현자들은 그러면 자유인에게 하는 말과 무엇이 다르냐고 되물었어요. 토론은 쉽게 끝나지 않았어요.
또 다른 가르침은 가말리엘의 집에서 일한 사람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칭을 붙였다고 전해요. 그들이 존중받을 만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요. 이 대목은 가말리엘이 타비의 죽음을 특별히 슬퍼한 까닭과 이어져요.
이야기가 남긴 교훈
사람의 가치는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표로 정해지지 않아요. 가말리엘이 타비의 바른 삶을 기억한 것은 한 사람을 그가 한 행동과 성품으로 바라본 한 걸음이었어요. 오늘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해요. 누구도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고, 슬픔과 존중도 신분에 따라 나뉘어서는 안 돼요.
